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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죽음, 끝이 아니다 (1)(2019봄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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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의 죽음이야기] 남도문학 (특집)죽음과 문학
[연재 11]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뜬 구 름
<작자 미상 >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허공에 생기는 것이고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네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태어나고 죽으면서 오락가락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네
11. 죽음, 끝이 아니다 - (1)
▪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죽음 문제는 과학적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똑같은 이유에서 ‘죽음은 끝’이라는
주장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내린 사람이 죽음
이후에 예상치 못한 현상을 겪게 될 때 과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 같은, 보이지 않고 측정하기 힘든 영역의 문제에 접근함에 있어서
현재의 과학적 연구방법은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몸과 마음을 현재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현대 과학과 의학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현대인들은 무조건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료를 얻어야 하고 그것을 분석해 결론을
내어야 과학적 지식이라고 믿기 때문에, 실험과 관찰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영역에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 자료가 나오기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 죽음이 끝이 아닌 이유
죽음을 종말로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할 이유는 많다. 지금까지 살았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특히 수많은 증언들이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현재의 우리가 사는 세계만큼이나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 실체를 본 사람
들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체험을 한 후에 오히려 순간을 영원처럼 소중하게 헌신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한결같고 생생한 증언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와는 다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호스피스 봉사지의 증언 <근거 1>
호스피스 봉사자의 증언에 의하면, 임종을 2, 3일 앞둔 환자는 대화하던 중에도 갑자기
허공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누가 와 있다’ ‘누구를 보았다’고
말한다. 때로는 천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미
죽은 사람과 말했다고도 하고, ‘문밖에 누가 와 있으니까 들어오라고 하라’고 가족들에게
말한다고도 한다.
인간에게 두 눈이 있는 것은 삶과 죽음, 두 세계를 잘 보라는 뜻이며 많은 사람들은 살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보고 그 세계가 전부인 줄로 착각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며,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눈으로는 이 세상을, 다른 한
눈으로는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옆에 있는 가족들조차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환자가 헛것을 본다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종과정에서 당사자가 실제로 겪는 엄연한 사실이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보는 일은 매우 흔하게 일어나며 우리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갈
때는 대게 2, 3일 또는 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영혼과 같은 보이지 않는 형상은 과학적
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는 엄연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건강할 때는 움직이는 몸,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전부로 착각했더라도 막상 임종과정이
시작되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시점이 되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함께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호시피스 봉사자들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먼저
죽은 가족이나 기독교의 천사, 불교의 보살 등과 죽어가는 사람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례를
증언하고 있다.
▸임사체험자의 증언 <근거 2>
임사체험자들이 증언하는 죽음이후의 세계는 최근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영어로 ‘Near-Death-Experiences’라고 부르는 임사체험(臨死體驗)은 한마디로 임상적으로
죽음 판정을 받았다가 얼마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되살아난 사람이 그 사이에 겪은 경험을
말한다. 임사체험 연구는 서양에서 30여 년 전부터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건에 이르는
다양한 체험사례가 수집되었고 ‘국제임사체험학회’까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1975년 미국의 레이먼드 무디 교수가 「삶 이후의 삶 Life-After-Life」을 출간한 이후 많은
전문가가 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임사체험자의 증언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임사체험자는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 자기의 육신을 허공에서 내려다본다. 이들의
의식은 분명하고 생생하게 깨어 있다. 자기가 죽었다는 의사의 판정을 직접 듣기도 한다.
체험자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단지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임을 경험한다. 살아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아무런 고통도 없는 평온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가족을 볼 수 있고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슬퍼하고 있는 가족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을 건넬 수가 없어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둘째,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임사체험자는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통과하는 듯 캄캄한
어둠속을 지나 삶과는 다른 현실, 다른 세계를 만난다. 어둠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차원 없는
공간을 떠다니기도 하고 급속도로 터널을 지나기도 한다. 흔히 ‘저승’이라고 불리는 세계로,
살아있을 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다른 세상이다.
셋째, 임사체험자는 빛의 존재를 만난다. 체험자마다 빛의 존재를 예수, 붓다, 보살, 마리아 등
다양하게 증언하지만, 체험자의 종교나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임사체험자는 사랑으로 감싸는 빛의 존재와 나누는 대화는 말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의사소통한다.
넷째, 임사체험자들의 다양한 증언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또 하나의 특징은 ‘파노라마처럼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갑자기 등장한 빛의 존재와 함께 체험자는 자기 삶에서 일생동안
겪었던 다양한 일들을 영상 이미지를 통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되돌아본다. 자기 삶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이런 회상을 통해 자기 삶에 대한 평가가 저절로 내려진다.
다섯째, 임사체험자는 돌연 어떤 장벽이나 경계선 같은 것에 도달한다. 몇몇은 먼저 죽은
친척이나 친구와 만나기도 하며, 가족을 돌보기 위해, 때로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삶의 목적을
위해, 때로는 사명감이나 봉사정신으로 자기 육신과 이승의 삶으로 되돌아와 복귀한다.
여섯째,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임사체험을 겪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살아난 체험자들은
이전의 삶과는 크게 다른 식으로 삶을 영위한다. 대다수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임사
체험자들이 크게 바뀐다.
체험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다.
또 체험 이전보다 훨씬 관대해지고 주변에 사랑을 베풀며 영혼이나 영성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는 등 삶과 죽음을 한층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사랑의 중요성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가하면, 물질적 향락을 덜
추구하고 영적인 차원과 영적인 의미에 대한 확신은 증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의 가르침 <근거 3>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생명과 사후의 생명은 예를 들어
서양 고전음악에서 서곡(序曲)과 그에 이어지는 오페라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종말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기에 메인 채 죽임을 당했지만 그 죽음으로부터 초월해 부활한 것처럼,
사후에 천국에 가서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다 함께 신의 무한한 사랑에
감싸인 채 삶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이 기독교 신앙의 근저에 있다. 따라서 성경은 죽음에
관해 체념조의 우울한 언어가 아닌, 기쁨으로 충만한 표현을 쓰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전한다.
특히 예수가 남긴 다음 말은 죽음에 임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위안으로 가득 찬 메아리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 것이요, 살아서 나를 믿는 자,
누구든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복음 11:25)
인도의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니르말 흐리다이’(순결한 마음의 장소라는
뜻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를 짓기도 했던 ‘마더 테레사’수녀는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누구보다 많이 보신 분이다. 테레사 수녀는 그들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수녀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테레사 수녀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으로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죽으면 어떻게
될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일 뿐 영혼은 계속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라고 수녀는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도 같은 의미
의 이야기를 한다.
사도 바울은 인간 존재를 순수하게 사멸하는 흙덩이, 즉 장막 적 존재라고 보았고, 사람이
영생하거나 새로운 영적 몸을 덧입는 것은 인간 자신 속에 있는 불사(不死)하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새롭게 덧입혀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종교마다 영혼이나
죽음에 대해 이해와 해석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연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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