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 親 會

[氏族의 原流를 찾아 / 밀양박씨 규정공파]

선우(善愚) 2020. 1. 4. 16:19



[氏族의 原流를 찾아 / 밀양박씨 규정공파]


 

박씨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역대 세계가 비교적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의 인구의 70~ 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 '8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이 8본이 역사상 많은 인물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김씨, 이씨와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한국의 3대성의 하나이다.

박씨는 옛문헌에 314본관이 있었지만 현재는 127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46개

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대한 유래는 알 수가 없다.


1960년 국세조사에 36만 7271가구에 인구 2,122,076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중

제3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는 3,435,640명으로 전국 가구 구성비 8.5%

순위는 275성 중 역시 김씨, 이씨, 다음으로 제 3위였다.


[유래와 시조]


신라가 생기기 전에 여섯개의 마을에 촌장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유 래]


1. 이(李)씨의 조상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의 알평(謁平).

2. 최(崔)씨의 조상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

  - 삼국유사에는 정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3. 손(孫)씨의 조상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

4. 정(鄭)씨의 조상인 취산 진지촌(嘴山 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

  - 삼국유사에는 최씨의 조상으로 되어있다.

5. 배(裵)씨의 조상인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의 지타(只他).

6. 설(薛)씨의 조상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의 호진(虎珍).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설화가 실린 삼국유사]


기원전 69년 이들 여섯 촌장들이 아들을 데리고 알천의 언덕위 모여서 백성을 다스릴 임금을

추대할것을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아래에있는 나정(羅井)이라는

우물가에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가서 보았더니 박같이 생긴 알이 있어서 알을 깨어보니 그곳에서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혁연히 세상에 나왔다고 해서 혁거세(赫居世)라고 하고 박에서

나왔다며 성을 박이라고해서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정이라는 우물에 용이 나타났는데 왼쪽갈비에서 어린 자아이가 나왔다.

얼굴과 입술이 고왔으니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아이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알영(閼英)이라고했다.


기원전 57년 이 두아이가 13세가 되자 박혁거세는 왕이되고 알영을 왕비삼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신라)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라왕실의 56왕은 박(朴), 석(昔), 김(金)의 3성에 의하여

교체 반복되었는데, 그중에서 박씨 왕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모두 10명이다.

박씨는 여러 본관 중 단연 1본도 외래 귀화족이 없다고 하며,

모든 박씨는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고 있다.

박씨끼리는 되도록 혼인을 피하려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시 조]


▷ 박혁거세 朴赫居世 [BC 69~AD 4]


신라의 시조(재위 BC 57∼AD 4) 왕의 성은 박(朴)이요 휘(諱)는 혁거세이다.

성모(聖母)의 휘는 파소(婆蘇)인데 본래 한(漢) 선재(宣帝)의 공주로 선술(仙術)을 배워

동(東)으로 해상(海上)에서 노닐다가 경주 선도산에 이르렀다.


서기 기원전 619년에 큰알를 낳아 양산(楊山)기슭 나정(蘿井)숲에 두었다.

이때 고허촌장(高虛村長)이 멀리 서광이 뻗친 것을보니 마치 선인(仙人)이 엎드려 절 하고

있는 모습 같았다. 이윽고 알을 깨고 남아(男兒)를 얻으니 형체가 단정하였다.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매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나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다.

 

육촌(六村)사람들은 그 출생이 하도 기이하여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나이 열셋에 의젓함이

어른같아 육촌장들에게 추대되어 임금이 되었다.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는데 때는 오봉(五鳳) 원년갑자(元年甲子) 기원전 517년 4월이었다.


5년 봄 정월(正月)에 알영(閼英)씨를 왕비를 맞았는데 왕비의 출생도 역시 상서로웠다.

즉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아(女兒)를 낳으므로 한 할미가

이상히 여겨 거두어 기르고 샘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불렀다.


자라서 왕비가 되어서는 어진덕으로 왕을 잘 보필하니 백성들이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왕 8년에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려다가 왕의 신덕(神德)을 듣고 곧 물러갔으며 17년에는 왕과

왕비가 육부(六部)를 돌아보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 19년에는 변한(弁韓)이 항복해오고

21년에는 수도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불렀으며 26년에는 비로소 궁궐을 지었다.


30년에는 낙랑인이 노략질을 하려고 왔다가 국경에 들어서서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들에는 노적가리가 많은 것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나라이니 범할 수 없다』

고 하며, 철병해 돌아 갔다. 38년에는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보내어 수교하게 되었는데


그 왕이 사대(事大)의 예를 책망함으로 호공이 응수하기를『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일으켜

인사에 질서 있으므로 천시(天時)가 화(和)하고 창고가 가득하여 백성들은 겸양 합니다.

그리하여 진한(辰韓),변한(弁韓),낙랑(樂浪),왜인(倭人)들은 모두 외복(畏服)아니함이 없지만

우리 왕께서는 겸허하여 소신으로 하여금 수교를 하게하니 예에 지나

치다고 할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마한(馬韓)왕이 노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좌우의 만류로 그만 두었다. 해를 넘겨이듬해에

마한왕이 돌아가므로 어떤이가 왕께 권유하기를 전에 마한왕이 우리사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지금 상사(喪事)때 마한을 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왕은 남의 재앙을 좋아한 것은

불인(不仁)이라 하고 도리어 사신을 보내 조문케 하였다.


53년에는 동옥저(東沃沮)의 임금이 양마 20필을 바치면서 이 사람이 듣건데『남한(南韓)에

성인이 있다하기로 이렇게 올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삼국은 모두 전쟁을 숭상

하였는데 왕만은 홀로 인의(仁義)를 지키고 위력을 내세우지 않으니 원근 여러나라가 풍문을

듣고 불침되기를 원하는자가 매우 많았다.


61년 갑자(甲子)서기4년 3월에 왕이 돌아 가시니 수(壽)는 73세였다. 태자 남해(南解)가

왕이 되어 이해에 왕을 수도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왕이 돌아가신지 7일만에 왕비 알영씨도

따라 돌아가셨다. 왕이 불던 옥적(玉笛)이 아직도 조령 서쪽에서 소리가 퍼지고 있으며

왕이 쓰던 금척(金尺)이 아직도 건천 남쪽에서 빛을 들어내고 있으니 왕의 영원한 존재가

여기에 더욱 뚜렷한 것이다.


남해왕 뒤에 박씨왕이 전해지기 팔대에 사위인 석씨와 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었으며

서라벌의 국호는 지징왕때에 신라로 고쳤는데 그때가 992년 이었다.

세종13년 서기1429년 비로소 고도(故都) 경주에 사당을 세우고 경종3년 서기1723년에

전호(殿號)를 걸어 숭덕(崇德)이라하며 나라에서 제사지냈다. 영조27년 서기 1751년

신주(神主)에 왕자(王字)를 쓰게하고 묘비를 세웠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하는 기원전후의 우물지>

      * 소재지 : 밀성재(密城齋)/경남 밀양시 내일동 331번지-


[밀양 박씨 규정공파 중시조] 

  

▷ 박현 (朴鉉, 1280-1367 향년 87)

   * 묘소 : 京畿道 高陽市 元堂洞 舟橋里 소재


낙촌 박충원의 묘가 있는 능골 일대는 밀양박씨의 묘역이 넓게 산재해 있어 일명

박재궁이라 불린다. 원당의 고양시청에서 벽제 방면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능골 이란

표지판과 함께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약 50여m 쯤 들어가면 1988년 중건한

밀양박씨의 웅장한 재실인 추원재가 있고 뒤편 야산을 따라 이 문중의 묘역으로 넓게

산재하고 있어 일명 박재궁이라 부른다.


밀양박씨의 오랜 세거지로서 고양시청 뒤 마상공원까지 넓게 마을과 선산이 있어서 지금도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4천여명의 후손이 모여 시제(時祭,시향時享)를

지내는 일대 장관을 연출하곤 한다.


추원재 뒤편 야산에 낙촌 박충원의 묘가 있는데 고양시 향토유적 26호로 지정된 박충원

신도비의 비문과 강원도 영월에서 구전되어 오는 설화를 보면 이때 영월에서는 부임하는

군수마다 원인도 모르게 죽어나가 요담(妖談, 유언비어)이흉흉해 모든 사람이 이곳에 부임

하기를 꺼렸으나 낙촌선생은 초연히 처신하니요언(妖言)이 무산됐고 단종의 무덤을 찾아

상소를 올린일화가 있다.


(12월 31일자 고양신문) 밀양박씨 규정공파는 밀양박씨 12중조파의 한파로 고려시대

문하사중을 지낸 박언부의 후손인 규정공 박현을 중조로 제향은 매년 10월 1일 오전

10시에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추원재가 있는 선산에서 모신다고 보도하고 있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유혈로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에 있는 밀양 박씨 규정공파의 제1묘역과 제2묘역이 좋다.

규정공파 파조 박 현과 그 아들은 묘역 상단에 비석으로 모셔져 있다. 밀양 박씨는 우리나라

대 성씨를 金李朴이라고 할 만큼 그 수가 많다.


그 밀양 박씨 중에서도 규정공파가 60~70%라고 하니 엄청나게 번성했다고 볼 수가 있다.

파조의 묘역은 고양시 원당 주교동에 제1묘역 상단에 비석으로 모셔져 있는데, 그 아래

상장군과 그 아래에는 나산경수의 박강생은, 규정공의 현손으로 고려 말에 집현전 재학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후 태종~세종대에 수원부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전 한다.


그의 아들 충정공 박심문은 절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단종 초 수양대군 일파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성삼문등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끝에 음독자결을 하였다.


파주시 오금리에 있는 공효공 박중손은 박 심문의 중형 절문의 아들로, 그는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정난공신 2등으로 밀산 군에 봉해지고, 세조때 공조 이조 형조 예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고, 그 후대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공간공 박건은 중손의 아들로

중종반정에 참여 정국공신3등으로 밀산 부원군에 봉해졌다.


[낙촌공  박충원]


그리고 양관 대제학을 지낸 유명한 낙촌공 박충원은, 제 2 묘역 상단에 있다.

낙촌공 박충원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명종 때는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선조 대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밀양 박씨가 낳은 유일한 상신인 숙민공 박승종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 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냈으나 광해군을 잘못 보필했다해서 수원부사로

있던 아들과 함께 자결을 하였다. 오늘날 이분과 같은 고위 공직자가 있을까 싶다.


[규정공파에서의 대표적 인물]


박강생(剛生), 박심문(審問), 박중손(仲孫), 박건(楗), 박훈, 박충원(忠元), 박계현(啓賢),

박승종(承宗), 영(英), 박성원(聖源)


[파 조]


박심문 (朴審問 1408∼1456)


▶ 號는 淸齋 密陽人으로 官止正郞 諡號는 忠貞이다.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靑齋). 본관은 밀양(密陽).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이 되었고,

1436년(세종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453년 (단종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청재공 휘 審問 부조묘(大齋日고위 음력 10월 10일, 비위 음력 10월 13일고양군 원당읍

성사리에 있는 청재공 휘 심문 및 配 貞夫人淸州 韓氏묘소 년중 寒食日 重九日 奉祀


▷ 대전 ......... '창계 숭절사'가 있다

 * 종 목 문화재 자료 2호 * 명 칭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 분류 사묘재실 * 수 량 1동

 * 지정일 1989.03.18  * 소재지 대전 중구 안영동 560 * 소유자 박헌석 * 관리자 박헌석


※ 본문 설명

숭절사는 1923년 세운 사당으로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던 박팽년(1417-1456)과,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함께 복위운동을 도모했던 박심문(1408∼1456)을 모신 곳이다.

박팽년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7년(1434) 문과에 급제한 후 단종 2년(1453)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는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는 중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심문 선생 역시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인 김종서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원래 정절서원(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의 위패를 모셨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헐려, 지금 있는 곳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보충설명

숭절사는 앞에 유등천(柳等川)이 흐르고 뒤에 멀치감치 겹쳐 병풍처럼 있는 산줄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유등천은 창계(滄溪)라 불리워서 이사당 역시 창계 숭절사(滄溪 崇節祠)라 한다.

이 건물은 1923년에 건립된 사당으로 사육신 중의 한 분인 취금헌 박팽년(翠禽軒 朴彭年)선생과

그의 동지였던 박심문(朴審問 : 1408∼1456)선생을 모시고 있다.


박심문선생은 23세때인 세종13년(143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육진(六鎭)개척때 김종서(金宗瑞)를

따라 큰 공을 세웠다. 세조가 즉위하자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중 의주에 이르러 육신(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음독 순절하였다.


그후 그의 이러한 행적(行蹟)이 순조때 조정에 알려져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사육신에다 그를 함께해 사칠신(死七臣)이라고 일컬어졌다. 조선시대 이래로 동구 가양동에 있는

정절서원(靖節書院)에서 박팽년선생을 비롯한 여러분을 모시고 제향(祭享)을 받들어 왔으나

고종8년(1871)에 서원이 훼철되자, 이곳을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향을 지내게 되었다.


▷강원도 영월 ......... '창절사'가 있다

단종(재위 1452∼1455)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세조(재위 1455∼1468)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육신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와 절개를 지키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숙종 11년(1685)에 홍만종의 건의로 지어졌으며, 사육신 외에도 엄흥도, 박심문 그리고 생육신 중

김시습과 남효온 등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경내에 있는 문루인

배학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앞면 3칸에 모두 문을 설치하였고, 2층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 뿐이다.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 명칭 :파주 공효공박중손묘역내 장명등(坡州恭孝公朴仲孫墓域內長明燈)

* 종목 : 보물 제1323호    * 지정일 : 2001.09.21

* 분류 : 유적건조물 /종교신앙/불교/석등 *  수량/면적 : 2구 

* 소재지 : 경기파주시 탄현면 오금 2리 산19 시대 : 조선시대

* 소유.관리자 : 밀양박씨규정공파대종회


[일반 설명]

    박중손(朴仲孫)세종(世宗) 17년 (을묘, 143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2(丙科2)


인적사항

* 생년(生年) 임진1412(壬辰1412) * 자(字) 경윤(慶胤) * 호(號) 묵재(默齋)

* 본관(本貫) 밀양(密陽)  *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 諡號, 封號 공효,

* 정난공신/밀산군(恭孝,靖難功臣/密山君)


-1412(태종 12)∼1466(세조 1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찬성사(贊成事) 강생(剛生)의 손자이며,

  교서관정자 절문(切問)의 아들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가 되고, 부수찬·지제교를 거쳐

  사인·집의·지병조사(知兵曹事)·동부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지면서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아들로 영빈 강씨(令嬪姜氏) 소생인 사위 화의군 영(和義君瓔)이 수양대군을

  반대하다 귀양가게 되어 한때 난처한 입장에 빠졌으나, 이어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뒤 대사헌, 공조·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세조초에 좌찬성에 승진되었고 세 차례에 걸쳐 고시관이 되어 많은 인물을 등용시켰다.

  시호는 공효(恭孝)이다.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남평 문씨는 공조정랑 문승조의 딸이다.

  공효공 박중손과 정경부인의 묘 앞에 있는 2기의 장명등이다. 박중손(1412∼1466)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을 관찰하는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 남평 문씨는 공조정랑 문승조의 딸이다. 2기의 장명등은 각각 2개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받침대인 대좌와 불을 밝히는 화사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지붕돌인 옥개석과 그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로 구성되었다.

  공효공 박중손 묘 앞 장명등의 앞면과 뒷면 화창 모양은 사각형이나 동쪽의 화창은 동그란

  원형이며 서쪽의 화창은 반달모양으로 화창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다.

 

  화창의 사각형은 땅(地)을, 원형은 해(日)을, 반달모양의 화창은 달(月)을 각각 상징한다.

  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박중손 묘 앞 장명등보다 전체적으로 가늘고 긴 모양을 하고 있다.

  화창은 4면 모두 사각형으로 만들어 서로 비교가 된다. 이 장명등은 화사석과 대좌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고, 특히 화창의 모양이 각각 땅과 해, 달을 상징하여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특수한 수법과 형태의 장명등은 매우 희귀한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타 씨족 유적지 검색 * 유적지 검색 http://blog.daum.net/parkst/7371027


[부제학(剛生)공의 유서] 

 

나는 본시 밀양 寒族으로 법 받을 바 없으나 고조 鉉(1280-1367)은 사헌부 규정으로

삼품 벼슬을 하시고 연로하신 후에 고향에 돌아와 팔십칠세의 수를 누리셨고

증조 文有(1300-1395)는 과거에 뽑히시어典理佐郞이 되시어 또한 삼품으로 치사하신 후에

농촌에 처하시어 구십 오세까지 수를 누리시더니 내가 어려서 뵈었고 조부 思敬(1322-1415)은

벼슬이 典法判書 겸 上將軍의 지위에 이르시어 推誠翊威의 네 글자로 된 공신의 칭호를 받으시니

우리 집안이 이에 이르러 명성이 드높았다.


나는 나이 열세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니 할아버님이 나의 외로움을 애처롭게 여기시어 친히

학문을 권장하시어 비록 다 통달하지는 못했다 해도 무식을 면하여 오늘에 이른것은 모두

할아버님이 주신 덕택이다. 할아버님께서는 기질이 온후하시어 자손을 사랑으로 교육하시고

비복을 예로써 대우하시어 비록 천한 하인이라해도 거친 말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역시 구십삼세의 상수를 누리시고 하세하시니 비록 크게 등용되시지는 못했다고 해도 덕화가

생민에 미쳤고 자손들의 법을 받을 만한 분이시었다. 조상들께서 적선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춘추가 모두 팔십을 넘기셨겠는가.


나는 우리 자손들이 조상게서 적선하신 음덕으로 뒷날 반드시 세상에 크게 쓰이리라고 생각한다.

선고 침께서는 벼슬이 전의판사까지 되시고 향년 오십팔세에 조부모님보다 먼저 떠나셨고

어머님은 밀산군 박인의 따님으로 장경공 유돈의 외손이시고 좌대언 겸 간의대부 용문의 손녀이시다.

어머님께서는 세 아들과 딸을 두시고 춘추 삼십구세에 하세하시니 아버님께서는 다시 곽씨를 맞으시어

한 아들과 두 딸을 낳으셨다.


나의 기질은 둔탁한데다가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쓸모가 없게 되었다.

늦게 학문을 하려하나 심신이 이미 쇠퇴하여 마침내 성인의 학문을 만분의 하나도 통달할 수가

없었다. 이러므로 경륜과 시책에 어두운 일이 많아 취할 바가 없었으니 너희들은 잘 성경현전을

읽어서 반드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일가에 돈목하여 사람이 착하지 않거든

사귀지 말고 물건이 의가 아니거든 취하지 말아서 부모를 빛나게하라.


형과 아우는 모습은 다르더라도 기는 같은 것이다. 사생고락을 어디로 가나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죽고 상하는 화를 당했을 때 타인들은 두려워하고 꺼려하나 오직 형제들은

슬퍼하고 생각해서 들에 쌓여 있는 즐비한 시체 속에서라도 서로 구해 준다했고 또 이르기를

처자가 피파와 거문고를 타듯 좋게 모여 잘 지낸다하더라도 형제들이 화합해야만 화락하고 맑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비록 좋은 벗이 있다 하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형제는 서로 구원해 주지만

친구들은 길게 탄식할 뿐이라 했다.


그러한 죽 처자와 친구들은 구하기가 쉽지만 형제는 다시 더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요사이 세상 사람들이 아내와 자식을 관청에 소송까지 하고 욕지거리하여 지친이 원수가 되니

이보다 더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싸우기 좋아하는 사나운 마음을 버리고

술이 있거든 걸러서 대접하고 술이 없거든 사서라도 대접해서 날마다 화락하게 지낼 것이니라.

만약에 공손치 못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는 나라의 법이 있느니라.


혼인하는 예는 만대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삼가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대개

혼인을 의논할 때 먼저노비의 많은 것과 벼슬이높은 것을 말하고 사위감과 며느리감의 성행이며

가법이 어떠한 것은 의논하지 않는다하니 딱한 일이다. 사위가 어질면 다른 날 반드시 부하고

귀하게 될 것이요 사위가 어질지 못하면 다른 날 반드시 빈천하게 될 것이다. 며느리란 집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 하기도 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한 때의 부자집 딸이라 해서 장가를 들었다가 며느리가 친정집의 부하고 귀한 것을 자세해서

지아비를 가볍게 여겨서 집안에 하인들은모두 우리 친정의 노비요 식전방장이 모두 다

우리 친정에서 준 것이요 당신의 높은 벼슬도 모두 다 우리 집 덕이라 해서 남편이 한번 쯤

저물게 나갔다가 밤 늦게 돌아오면 교만하고 투기하여 악성으로 종의 자식 꾸짖듯할 것이니

다음날 한량없는 우환거리가 되는 것이다. 설사 아내 집의 세도를 빌어서 부귀를 얻는다 한들

사내 대장부로서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랴.


너희들은 반드시 성행과 가법을 살펴서 혼인을 하도록하라.

한 번 시집을 간 후에 종신토록 개가를 하지 않는 것이 부인의 도리어늘 내가 보니

명문우족 가운데 남편이 죽은 후에 다시 시집가는 여자가 있고 두 번째 과부가 되어도

또다시 개가하는 여자가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랴.


만약 부모가 생존해서 딸이 자식없는 청상과부가 된 것을 가엾게 생각해서 개가를 시킨다해도

옳지 못한 일이거든 하물며 부모가 아니 계시고 자손이 있는데도 음탕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제 자신이 스스로 중신을 해서 시집을 가는 자 있겠는가. 족히 거론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내 대장부가 여자의 재산에 눈이 어두어 실절한 더러운 계집을 보고도 아내를 삼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소와 말에게 사람의 옷을 입힌 것과 무엇이 다르랴.

너희들 자손은 나이 비록 늙었다 해도 실절한 계집을 짝하지 말고 딸들을 일찍 상부해서

자식이 없더라도 다시 두 사내를 섬기지 말아서 박씨의 가법을 이루게 하라

만약 나의 훈계를 듣지 않는 자는 종족의 서열에 들게 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살다가 죽는 것은 인도의 자연이다. 예로부터 이제까지 이르도록 초연히 백세를

넘어서 혼자 사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 족히 한탄할 일이 아니니라. 나와 너의 어머니가

죽게 되는 날 부질없이 통곡만 하지 말고 초종법절을 주문공 가례대로 하여 불사하지 말고

선조와 선인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만약 먼 곳에서 죽어서 운구하기 어렵게 되거든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토색이 윤택한 곳을

택하여 장사지내라. 무덤 곁에 초막을 꾸미고 시묘를 하겠다는 자가 있거든 일체 공봉을

자손들이 돌아가면서 받들게 하라. 가묘는 사람의 자손이 보본추원하는 크나큰 예법이다.


우리 동방에 가묘의 법을 폐지한지 이미 오래서 비록 명유라고 하는 사람들도 모두 다 유행하는

풍속에 빠져서 단지 소찬으로 제사를 지내니 조상께 너무나 박하다. 어찌 이같이 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반혼 삼우 소상 대상사중제사의 예를 다 주문공가례에 의해서 때에 따라 받들게 하라.

노비란 것은 조상께서 내려 주신 것이요 내가 사사로이 얻은 것이 아니다. 한 집안의 농사짓고

밥짓는 괴로운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없다면 물 길러야 하고 밭 갈아야하는

 일을 내가 친히 해야 하니 어찌 고맙게 생각해서 구휼하지 아니 할까보냐.


세상 사람들은 좋은 벼슬자리를 급히 얻으려 하여 권문세가에 문서를 작성하여 부조때부터

내려온 노비를 받치고 첩을 위해서는 재산으로 주기도 하고 자식을 기르라고 해서 주기도

 해서 정작 적자본손은 도리어 천하게 되어 생활하는 데 괴로움을 면하지 못하게 되니

조상께서 물려 주신 근본 뜻이 어데 있는가. 만약 아들이 없다면 종중에서 쓸만한 아이를

택해서 양자를 삼아서 노비를 주게 하라.


그리고 적자나 중손은 매일반이다.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랴. 세상 사람들은 한 자손만

사랑해서 비복을 많이 주기도 하고 후처 자손을 귀여워해서 비복을 더 주니 딱한 일이다.

그리고 수요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 데 대주가 먼저 죽었다고 해서 비복을 감해 준다면 역시

조상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속담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것이 없다 하지 아니 했는가.

그리고 아들과 딸은 차등이 있어야 한다. 아들은 사자(嗣子)다. 한집안의 일과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지만 다만 딸만 있고 아들이 없다면 그것은 절사가 되는 것이니 아들과 딸은 동등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자손 중에 이같은 몇 가지 조건을 범하는 자가 있거든 유사한데 고해서 그 불효한 죄를 꾸짖고

주었던 노비를 빼앗아서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가하다.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재물에 대해서는

구차히 얻으려 하지 말고 분재를 할 때는 많이 구하지 말라 했다.

자손들은 뼈에 새겨서 명심하라.


審問이 어느 날 문서를 헤치다가 이 글을 발견하고 글 뜻과 필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곧 선인(剛生)께서 저술하신 것이다. 읽어보매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슬픈 눈물이

주루루 흘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원고만 있고 아버지의 함자를 쓰지 아니하셨으니


혹시나 후세의 자손들이 선인께서 후손들에 끼쳐 주신 의법(懿法)을 믿지 아니하고

실행하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이 초고는 선인의 필적이 분명하니 어찌 믿지 아니하랴.

더구나이유의는 정대공명하여 우리 자손들 만의 모범이 될 뿐이 아닌 까닭에 차마 인물시킬 수

없어서 정서를 한 후에 선인의 초고를 연첩해 붙여서 끝에 그 사유를 써 놓는다.


[후손 월탄 종화 번역]

 <참고>

* 연대 추정 : 청제공 24세손 박문규의 연구에 의하면

  - 규정공(박    현) : 1280-1367 향년 87세

  - 좌랑공 (박문유) : 1300-1395 향년 95세

  - 상장군 (박사경) : 1322-1415 향년 93세

숭덕전

박혁거세

경북 경주시

숭성전

박언침

전남 순천시

숙모전

박심문

충남 공주

숙모전

박대손

충남 공주

숙모전

박충원

충남 공주

원덕사

박언침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언부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언상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언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양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천익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원광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척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중미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현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을재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원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원덕사

박위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월현사

박침

경기도 개성

세덕사

박현

전남 장흥

세덕사

박사경

전남 장흥

세덕사

박충원

전남 장흥

세덕사

박승종

전남 장흥

창절사

박심문

경기도 영월

숭절사

박심문

덕산사

박증영

충남 금산

덕산사

박훈

충남 금산

삼충사

박춘성

전북 남원

금곡사

박건

전남 보성

미산서원

박심문

전남 해남

진도서원

박심문

전남 진도

국계서원

박증영

충북 청주

국계서원

박훈

충북 청주

화암서원

박훈

충북 청주

송계서원

박영

충북 황간

금오서원

박영

경북 선산

남강서원

박한주

대구 직할시

이산묘

박심문

전북 진안

부조묘

박심문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대농

부조묘

박건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

부조묘

박중손

충북 청원군 옥산면

부조묘

박숭원

충북 청원군 강내면